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문단 편집) === 2000년대 === 99/00 시즌 우승부터 2000년대 초중반 데포르티보를 거쳤던 선수들 ▶[[리오넬 스칼로니]]: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한 멀티 플레이어. 주 포지션은 오른쪽 측면 수비, 윙어였으나 수비형 미드필더도 가능했다. 04/05 시즌을 끝으로 프란 곤살레스와 마우로 실바가 은퇴한 후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05/06 시즌 호아킨 카파로스 감독 및 구단 운영진과 불화를 빚었고 결국 리빌딩의 일환으로 시즌이 끝난 후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세리에 A의 라치오, 아탈란타에서 활약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소속으로 2006 월드컵에 참가한 적이 있다. 데포르티보를 떠난 후에도 이탈리아에서 꾸준히 경기를 관전하러 올 정도로 애정이 대단하다. 일찌감치 지도자에 대한 열망이 있었는데 데포르티보의 감독이 되는 것은 나의 꿈이라고 여러번 밝혔다. 호르해 삼파올리의 수석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받은 후 아르헨티나 감독 대행을 거쳐 현재 감독을 맡고 있다. 2021년 아르헨티나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2022년 메시의 마지막 월드컵인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다. ▶[[마누엘 파블로]]: 유스 출신이 아님에도 1998년부터 2016년까지 무려 18년을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한 레전드. 2000년대 초반 20대 초반에 카푸, 사네티와 함께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01/02 시즌 정강이가 두동강 나는 중상을 당하며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 투철한 프로 정신을 바탕으로 만 40세까지 현역으로 뛰었다. 현재 팀에서 유소년 코치로 일하는 중. ▶[[엔리케 로메로]]: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한 레프트백. 20대 중후반에 이르러 기량이 만개한 대기만성형 선수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프리메라 가를 대표하는 풀백이었다. 특히 99/00 시즌 데포르티보의 우승 이후 좌측의 엔리케 로메로, 우측의 마누엘 파블로가 이끄는 측면 수비는 프리메라 리가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절대 과장이 아닌 것이 레알 마드리드의 [[호베르투 카를루스]]나 [[미첼 살가도]]는 공격적인 능력은 뛰어났으나 수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반면에 로메로와 마누엘 파블로는 적절한 공격적 재능에 수비력까지 갖춘 자원들이었다. 더해 데포르티보는 99/00 시즌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홈에서 5:2 대승을 거둘 정도로 공격적인 팀이었고 어느 팀보다 풀백의 오버래핑을 잘 활용했던 팀이기도 했다.] 2002 한일 월드컵에도 참가해 한국전을 비롯해 3경기를 풀타임으로 소화했다. 유로 2004도 참가가 유력했으나 어처구니 없는 부상으로 기회를 날렸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다치거나 뱀에게 물리는 등 기이한 부상을 당하며 동료였던 조안 카프데빌라에게 자리를 내줬다. ▶[[빅토르 산체스]]: 레알 마드리드, 라싱 산탄데르를 거쳐 1999년 여름 데포르티보에 입성한 후 [[루이스 피구]], [[호아킨 산체스]]와 함께 꾸준히 라 리가 최고의 우측 자원으로 평가 받았다. 면도날 크로스와 속 시원한 중거리 포는 빅토르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2006년 데포르티보를 떠나 파나티나이코스로 이적, 그 후 세군다 리가의 엘체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당시 헤타페의 감독이었던 미첼의 수석 코치로 세비야, 올림피아코스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작년 여름 미첼과 결별한 후 감독직을 구하다가 강등 위기에 직면한 데포르티보로 9년 만에 돌아왔다. 감독 경력이 없었음에도 팬들은 빅토르가 팀을 강등에서 구해낼 것이라 굳게 믿었다. 빅토르는 14/15 시즌 데포르티보를 잔류시킨 후 15/16 시즌 데포르티보를 잔류시키며 팬들의 믿음에 보답했다. 그러나 구단 운영진과 불화로 일방적으로 경질당했다. ▶[[세사르 마르틴]]: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데포르티보에 몸담았던 중앙 수비수. 스페인 청소년 대표팀의 모든 연령대를 거친 엘리트였고 장차 데포르티보의 핵심이 될 수비수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나이베트가 생각보다 오래 기량을 유지했고 설상가상으로 안드라데가 영입되며 로테이션으로 굳혀졌다. 03/04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 포르투 전에서 [[데쿠]]에게 뒤늦은 태클로 페널티킥을 내주며 데포르티보 팬들을 눈물 짓게 만들기도 했다. 스페인 대표팀 소속으로 12경기 3골을 기록했고 유로 2004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로이 마카이]]: 99/00 시즌 우승 당시 최전방을 책임졌던 공격수. 그러나 00/01 시즌과 01/02 시즌엔 디에고 트리스탄에게 밀려 오른쪽 윙으로도 출전하는 등 데포르티보 생활이 항상 순탄치는 않았다. 그러다 트리스탄이 부상으로 신음하던 02/03 시즌 폭발하기 시작했다. 리그에서만 29골을 터트리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또한 스페인 클럽의 무덤이라 불렸던 올림피아슈타디온 원정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데포르티보의 역사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데포르티보는 스페인 구단들 중 최초로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승리를 거둔 팀으로 기록된 것. 당시 스페인에선 상당한 화제거리였다.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도 못했던 일을 언더독 데포르티보가 해냈기 때문. 더군다나 당시 레알 마드리드-데포르티보-바르셀로나 사이의 라이벌 의식도 컸던 상황이란 것을 감안해야한다. 아직까지도 바르셀로나는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서 승리가 없다. 레알 마드리드도 13/14 시즌에 가서야 징크스를 깨트렸다.] ▶[[슬라비샤 요카노비치]]: 구 유고 연방 출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99/00 시즌 우승 멤버다. 마우로 실바, 플라비우 콘세이상이 볼란테로 출전한 가운데 로테이션으로서 쏠쏠하게 활약했다. 한 시즌만 뛴 후 첼시로 이적했다. ▶[[디에고 트리스탄]]: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활약했던 스트라이커. 데포르티보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당대 스페인이 내놓은 무결점 스트라이커. 지금도 스페인에선 게으른 천재의 대명사로 언급될 정도로 타고난 재능은 남달랐다. 특히 01/02 시즌 보여준 임팩트는 3대 빅 리그 공격수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꿀릴 것이 없었다. 맹활약에 힘입어 2002 월드컵에는 스페인의 10번으로 참가했다. 월드컵 도중 당한 부상 이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평소에 훈련을 게을리했고 부상을 당한 후에도 계속해서 늦은 밤까지 파티를 즐기는 등 자기 관리에 실패하며 04/05 시즌 이후로는 완벽히 퇴물로 전락했다. 재능은 재능인 것이 퇴물로 전락한 후에도 리보르노와 웨스트 햄을 통해 빅 리그를 전전했다. 데포르티보와 끝이 나빴지만 최근 리아소르나 훈련장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왈테르 판디아니]]: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다. 타겟형 스트라이커로 골문 안에서 존재감이 돋보였던 선수. 다른 능력은 애매했지만 헤더로 득점하는 능력 하나는 최고였다. 항상 머리를 밀고 다닌 것도 있고 헤더가 좋다보니 오래전 [[사커라인]]에선 황금 대가리로 불리곤 했다. 00/01 시즌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파리 생제르맹 FC]] 전에서 후반전 교체 투입되어 머리 3골 헤트트릭을 작렬하며 4:3 기적같은 역전승을 만들며 스타덤에 올랐다.[* 전반전 스코어는 0:3이었다.] 하지만 디에고 트리스탄, 로이 마카이 때문에 [[올레 군나르 솔샤르|솔샤르]]처럼 수퍼 서브로 활용되었다. 주전으로 나선 때는 03/04 시즌밖에 없었고 이 때 정점을 찍었다. 16강 유벤투스 원정에서 1골, 8강 AC 밀란 전에선 [[리아소르 기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주로 페널티 박스 안에서만 노는 선수라 지원 사격이 좋지 않으면 덩달아 부진했다. 쉽게 말해 혼자서 골을 만들지 못했던 선수라 클럽에서나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나 크게 중용받지 못했다. ▶[[프란시스코 몰리나]]: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데포르티보의 골문을 지켰다. 유로 2000 노르웨이 전 저지른 실수로 인해 스페인 국대와는 인연이 없었으나 라 리가에선 언제나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였다. 은퇴 직후 빠르게 감독직에 도전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호안 카프데빌라]]: 데포르티보에서 2000년부터 2007년까지 7년 동안 활약했다. [[엔리케 로메로]]에게 밀려 오랜 시간 로테이션에 그치다가 05-06 시즌부터 뒤늦게 포텐이 폭발해 06-07 시즌에 이르러선 라 리가 최고의 레프트 백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시에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도 입지를 넓혀가며 [[유로 2008]]과 [[2010 월드컵]] 우승 당시 주전 선수였다. 득점력이 수비수치고 상당히 뛰어났다. 데포르티보를 떠난 후에도 꾸준히 리아소르에 방문해 팬들과 경기를 관전하고 있다. ▶[[알도 두셰르]]: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팀에서 활약한 수비형 미드필더. 아르헨티나 U-17 대표팀부터 U-20 대표팀, U-23 대표팀까지 엘리트로 만 18세에 아르헨티나 1부 리그 소속 [[뉴웰스 올드 보이스]]의 주전 자리를 꿰찼을 정도. 만 19세에 포르투갈의 명문 [[스포르팅]]으로 이적해 좋은 활약을 펼쳤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청대를 고루 거쳤던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던 만큼 일찌감치 [[마우로 실바]]의 후계자로 낙점받았다. 물론 기대만큼 성장하진 못했지만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기량이 완성되며 리그 정상급 수비형 미드필더까진 찍어봤다. 비슷한 시기에 대표팀에도 발탁되어 5경기를 소화했다. 당대 아르헨티나 중원이 [[에스테반 캄비아소]],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라 그렇지 요즘 같았으면 꽤나 중용되었을 선수. 사실 두셰르가 유명해진 것은 2002 월드컵 직전인 01/02 시즌 [[데이비드 베컴]]의 발등을 부러트렸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최고의 스타가 월드컵 출전이 불투명한 상황에 놓인 것도 화가 나는데 하필 가해자가 아르헨티나 국적이라 분노는 두 배가 되었다. 디에고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은 물론 전쟁을 벌였을 정도니까. 잉글랜드 언론은 두셰르를 맹비난하는 기사를 하루가 다르게 내보냈고 두셰르도 여기다 대놓고 사과 안한다며 불을 지폈다. 일단 두셰르가 공을 먼저 건드렸으나 누가 봐도 거친 태클이긴 했다. 이 사건 때문인지 몰라도 베컴은 라 리가 진출 후 유독 아르헨티나 출신들과 다툼이 잦았다. 리오넬 스칼로니, 파블로 아이마르 등등]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 백만 데포르티보 팬들의 근원, 상징, 그리고 혼 그 자체였던 레전드. 플레이메이커 시대에 스페인이 내놓은 대답으로, 샤비와 이니에스타 이전 세대의 미드필더 중 가장 창조적이고 패스가 뛰어났다.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세군다 리가 최우수 공격형 미드필더상을 타며 팀의 승격을 견인했다. ▶[[로베르토 아쿠냐]]: 팀에서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활약한 중앙 미드필더. 90년대~2000년대 중반까지 파라과이 대표팀의 핵심, No.10이자 주장까지 맡았다. 사라고사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 1100만 유로, 당시로선 적지 않은 이적료에 영입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부상, 컨디션 저하로 한 시즌 10경기를 소화했던 적이 단 1번도 없었다. 팀 입장에선 희대의 먹튀. ▶[[조르제 안드라데]]: 2002년부터 2007년까지 5년 동안 팀 수비의 핵심이었다. 전성기 시절엔 뛰어난 운동 신경을 갖춘 정상급 수비수였다. 2007년 자유 계약으로 유벤투스로 이적했으나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2년 동안 4번의 공식 경기에만 출전했다. 포르투갈 대표팀의 주전 수비수로 51경기 출전한 바 있다. 2002 월드컵, 유로 2004에 참가했다. 2006 월드컵은 무릎 부상으로 불참했다. 베테랑 [[루이스 피구]], [[코스티냐]], [[파울레타]]가 2006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 및 대표팀을 떠나면서 누누 고메스와 함께 포르투갈의 주장단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본격적으로 부상으로 신음하던 시기라 그다지 존재감은 없었다. ▶[[알베르트 루케]]: 팀에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활약했던 왼쪽 윙어 내지 스트라이커. 03/04 시즌 스트라이커에서 왼쪽 윙어로 포지션 변경 후 포텐셜이 제대로 폭발하며 유럽 축구계를 대표하는 신성으로 떠올랐다. 세리에 A의 신성이 [[카카]]였다면 라 리가의 신성은 루케였을 정도. [[리아소르의 기적]] 당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AC 밀란]]을 침몰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스페인 대표팀으로는 [[2002 월드컵]]과 [[유로 2004]]에 출전한 경력이 있다. [[2006 월드컵]] 조별 예선 리투아니아 전에 중거리 슛으로 스페인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내는 등 2000년대 중반 스페인 최고의 왼발잡이로 떠올랐으나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이적 후 이적한 후 계속된 잔부상에 신음했고 기량이 빠르게 쇠퇴했다. 말라가에서 10-11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파브리시오 콜로치니]]: 04/05 겨울 이적 시장을 통해 영입되어 07/08 시즌까지 활약했다. 붙박이 주전이었고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쳤다. 마지막이었던 07/08 시즌엔 유망주, 퇴물로 구성된 4백 라인을 이끌고 엄청 고생했다. 눈물 없인 볼 수 없었던 시즌. 전반기 내내 콜로치니의 사자후의 주요 타겟이었던 [[필리페 루이스]]가 눈부신 성장세를, [[마누엘 파블로]]는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후반기엔 다행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전반기만 하더라도 19위를 찍던 팀은 후반기에 한 때 7위까지 치고 올라갔는데 콜로치니의 하드 캐리 덕분이었다. 그 결과 후반기 성적은 11승 2무 6패, 후반기로만 따졌을 때 4위였다. 2008년 여름 여러 명문 클럽들의 오퍼를 받았으나 가장 많은 이적료를 제시한 뉴캐슬로 이적했다. ▶[[알베르트 로포]]: 팀에서 2006년부터 2011년, 2014년부터 2016년까지 활약했다. 에스파뇰 황금 유스 세대의 일원으로 데포르티보로 이적 당시 리그 정상급 센터백이었다. 스페인 대표팀에 콜업도 받았으나 출전은 못했다. 당시 [[발렌시아 CF]],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비롯해 여러 명문 클럽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더 좋은 조건으로 이적할 수 있었으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팀에 뛰어난 선수들이 여럿 포진해있었고 무엇보다 에스파뇰 시절 동료였던 [[세르히오 곤살레스]], [[조안 카프데빌라]]의 설득으로 데포르티보 행을 결심했다. 꾸준히 수비 핵심으로 활약했으나 발밑이 상당히 투박하다는 점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필리페 루이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4년 동안 몸담았다. 과르다도와 함께 무너져가던 팀을 중상위권으로 끌어올렸던 구세주. 원래 수비력이 부족하다는 평이 많았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미겔 앙헬 로티나]] 지도 하에 수비력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08/09 시즌을 기점으로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레프트 백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정상급 기량을 유지했음에도 클럽 인지도 때문에 평가가 상당히 박하다. ▶[[안드레스 과르다도]]: 무너져가던 데포르티보를 잠시나마 끌어올렸던 멕시코의 국민 스타. 2007년부터 2012년까지 5년 동안 활약했다. 국가대표팀 선배이자 [[FC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고 있던 [[라파엘 마르케스]]의 적극 추천으로 입단했다. 당시 세계적인 유망주 중 하나였기에 팬들의 기대는 엄청났다. 입단식엔 무려 3,000명의 팬들이 몰려왔고 멕시코 전역에 생중계되었을 정도. 기대만큼 성장하진 못했지만 [[필리페 루이스]]와 함께 2000년대 후반 팀의 상징이었다. 과르다도-필리페로 이어지는 왼쪽 라인은 프리메라 리가에서 최고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2009년 2월 AS는 내국인 베스트 11, 외국인 베스트 11을 선정했고 외국인 베스트 11에 두 선수가 이름을 올렸다. 참고로 오른쪽 라인은 메시와 알베스.] 10/11 시즌 강등에도 불구하고 잔류하는 충성심을 보여줬고, 11/12 시즌 맹활약으로 승격에 크게 일조하며 아름답게 이별했다. ▶[[루카스 페레스]]: 2014-15시즌 [[PAOK FC]]에서 임대 간 후 에이스 활약을 하면서 완전 이적을 한다. 이후 2015-16시즌 팀에서 에이스 노릇을 한 뒤 [[아스날 FC]]로 떠났다. 이후 임대로 왔지만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하였다. 그리고 2022-23 시즌 연봉을 [[카디스 CF]]에서 받던 거에서 1/10으로 줄이고 이적료 100만 유로 중 49만 3000유로도 페레스가 사비로 부담하면서 레전드 중 한 명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